동으로 주조하여 도금한 6세기 말의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1 7세기) 백제 조상들의 걸작품으로서 한국이 대륙에서 유입되는 영향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를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청춘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젊은 얼굴에 무척이나 신선하고 상냥한 미소(그 유명한 백제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이 금동보살상은 인접한 왕국 신라(기원전 57 서기 668)에서 볼 수 있는 조각 초상의 엄숙함과 구별된다.
몸체는 연약하고 상체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으며 날씬한 허리에 팔 다리가 가냘프다.
서양식으로 사색에 잠긴 자세, 즉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 놓고,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가볍게 기울인 머리를 손으로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이른바 반가사유상으로 앉아 있다.
간다라 예술에서 유래되어 중국을 통해 유입된 이 같은 자세는 고대 한국에서 북에서 남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걸쳐 크게 호응을 얻은 것으로 보이며 6세기 이후에는 일본에 전파되어 나라현 호류지(법륭사)의 유명한 미륵보살상이 말해 주듯이 일본문화에 녹아 들게 된다.
곧게 내려와 앞으로 드리워진 옷주름은 ’열쇠 구멍’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중국 북위(386-535)의 불상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옷주름의 선이 굵고 강직하기 보다는 유려하게 처리되어 매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중국 남조와의 관계를 추측케 한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독특한 관을 쓰고 있는데 그 모양이 인도 북서 지방의 터번처럼 초생달을 연상케 하고 중앙에 달걀형 진주 모양의 장식이 박혀 있어 멀리 타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조각품은 한국 고유 예술의 한 상징이자 동시에 중국과 일본을 실크로드로 이어주는 가교로서 한국의 역할을 상징하기도 하다.